일상

자유수호의 탑(울진-삼척지구)

emhong 2015. 6. 1. 16:19

2015/6/1(역시 맑음)

 

 

울진군 북면에 위치한 현장 사무실을 나서서 호산 쪽으로 구길을 따라 가자니 무슨 전투기념비 같은 형상이 길가에 있다.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와 비문을 보니 아하! 이곳은 우리의 기억에 잊혀지지 않는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장소이며,

이 사태의 내용과 희생된 영령들을 기리기 위한 "자유 수호의 탑"이다.

 

기념탑의 페인트는 이곳저곳 벗겨져 있고, 콘크리트 구조물도 여러군데 깨져 나갔다.

잡초가 무성하여 기념비문을 가리고 있기에 흉물스런 모습이 더욱 방치된 느낌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당시의 불안정 했던 국가의 상황 속에서 일어난  끔찍하고 충격적인 사건으로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지울 수 없는, 이것이 어쩌면 내게도 일어날 수 있었던 사건이기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또 다시 반복될리 없고 반복되어서는 안될 그날의 그 사건을 다시한번 새겨보는 기회가

오늘 우연히 있었기에 비문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서 그 당시를 회상해 본다.  

 

 

삼척-울진지구 자유 수호기..

자유대한의 땅 여기 삼척과 저너머 울진 지역에 북괴 무장공비가 침투한 것은 1968년 10월 30일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같은 해 1월 20일 일부 무장공비 31명이 수도 서울을 습격한 이후 서해안과 중부전선에서 250여 건의

침입을 도발하더니 강원도 지역 산간 소부락을 혁명화하여 게릴라 기지를 학보하려는 목적으로 15명을 한 조로 한

8개 조 120여명이 수차례에 걸쳐 동해로부터 침투해 온 것이다.  삼차로 울진군 고포리 해안에 도착한 2개조

30명은 11월 3일 새벽 울진군 북면 고수동 산간마을에 침입하여 위조지폐를 나누어 주면서 정치공작을 시도 하였으나

투철한 반공정신으로 무장한 주민들의 협조 거부로 실패하게 되자 우체부를 비롯한 민간인 3명을 칼과 돌로 학살하고

도주 하였다.   두 지역에 계속적으로 침투한 다른 조의 공비들도 역시 공작에 실패하자 위조지폐를 살포하고 양민을

무차별 학살한 후 식량을 탈취하여 분산 도주 하였다.  정부에서는 11월 4일 이 부근지역 6개 군에 을종사태를

선포하고 섬멸작전을 펼쳤다.  남녀노소를 막론한 주민들의 릴레이식 신고와 군경 예비군의 합동작전으로 발붙일

곳 없이 해메던 공비들은

 

 

마침내 공산당의 본성을 드러내어 노인과 두서너살 어린아기까지 한 가족을 몰살하는 만행을 세 가족에게나 저질렀다.

12월 9일 도주하던 공비들이 평창군 용평면 노동리 계방산 기슭의 외딴집을 습격하자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하고 외치던

당시 국민학교 2학년 이승복군이 어머니 그리고 어린 두동생과 함께 숨져간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공산당의 만행에 치르 떨던 이땅의 백성들은  산악을 누비며 공비소탕에 목슴을 걸고있던 군경 예비군에게

격려와 위문을 아끼지 않았으며 예비군이 아닌 사람마저도 엽총을 들고 향군을 지원 하였다.

그리하여 사살 110, 생포 5, 자수 2명이라는 완전한 전과를 올려 동년 12월 25일을 기해 을종사태를 전면해제 하였다.

그러나, 아깝다. 이 가증스런 만행으로 아군측은 현역 및 예비군 33명, 민간인 16명이 고귀한 생명을 잃었으며

37명이 부상 당하였다.  이에 우리 삼척군민은 이 땅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려다가 순국하신 군경 예비군과

투철한 반공정신으로써 항거하다가 숨져간 어진 백성의 넋을 위로하고 이 충정을 후세에까지 길이 전하여

나라사랑의 교훈을 삼도록 이 탑을 세운다.    서기 1984년 6월.

 

 

우리시대는 암울하고 흉칙했으나 보람을 가질 수 있는 시대이기도 했다.

시대 역사의 내용은 다르고 격동기마다 그것의 과정이 혼란할지라도

종국의 결과는 긍정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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